따가워 스테이트먼트
안성석
작은 무엇이 내 눈을 따갑게 찌름. 따가운 것은 다름 아닌 작은 빗방울. 비는 평범하게 내렸어. 그저 내가 엄청난 속도로 움직였을 뿐.
처참히 희생된 사람들의 다져놓은 시공간을 살아가는 지금. 우리는 아주 중요한 것을 빼먹고 있어 그것은 아마 수치(혹은 양심)라고 불리는 듯.
따가움에 무뎌졌어. 명석한 두뇌를 가진 평범한 사람들이 잔인한 폭력을 행사하곤 하지. 2015년 우산과 부채라는 전시를 기획하며 생각했던 ‘우리는 왜 항상 서로에게 잔인할까?’에 대해 더 깊게 생각해보며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문제의 근원이 무엇인지 고민해.
따갑다는 것은 사람이 가진 수치심(양심)일 수도 있으며, 세상이 빠르게 회전하는데 있어서 생긴 반작용으로서 느끼는 속도감(힘)일 수도 있어. 나를 둘러싼 세상의 속도를 느끼며, 우리의 수치심을 증폭시키고, 나를 통해 전달되는 고통이 어떠한지 책정해보자.
혀가 너무 길어. 말이 너무 많아. 또 다음 변명은 무엇인지? 원래에는 "심장에 털이 났다"고 했어. 심장이란 원래 몸속에 있어서 털이 날 수가 없었는데, 그런 심장에 털이 났다고 하는 것은 심장이 매우 두껍다는 뜻. 원래 "
심장이 두껍다"는 말이 있었는데, 사람이 양심에 어긋난 짓을 하면 심장이 두근거려 표가 나게 마련인데, 양심이 불량하여 그렇지 않은 사람은 양심에 어긋난 짓을 하고도 그런 표가 나지 않으므로, 아마 그런 사람은 심장 껍질이 매우 두꺼운 모양이라고 짐작한 데에서 나왔겠지. 그 "심장이 두껍다"는 말을 좀 더 강조하여 실감 있게 표현하려는 데에서 "심장에 털이 났다"는 말이 쓰이게 되었어, 산업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또 군사정권이 원칙 무시하고 무엇이든 불도저식으로 마구 밀어붙이면서,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가 "결과가 좋으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흐르자, 양심을 어기는 것을 별로 꺼려하지 않는 풍조가 만연하게 되고, 그래서 "심장이 두껍다"는 말만 가지고는 표현이 부족하다고 느껴서, "심장에 털이 났다"는 말이 나오게 된 거야. 그 표현이 양심에 관한 것이라, 다시 "양심에 털이 났다"는 말로 바뀐 것이지. 네 눈앞에 펼쳐진 풍경 속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나보다, 내가 동그라미 쳐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