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기억에서 공동의 시간으로

파국 이후

3년 전 어느 전시장이었다. 잿더미가 된 풍경을 향해 조이스틱을 움직여 시선을 이동해 본다. 화염과 지진이 휩쓸고 간 불온한 땅, 모든 것이 폐허가 되어버린 이 장소에는 두 개의 거대한 상징만이 남아 허공을 부유한다. 중력에의 저항력을 상실한 광화문과 조선총독부 건물, 이에 더해 그나마 형체를 알아볼 수 있는 것은 부서진 바리케이드뿐이다. 지진으로 갈라지는 땅이 품은 화염은 아직 이 파국이 끝나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시선은 이곳을 배회하지만 불길하게 갈라진 땅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흔적도 찾을 수 없다. 이 작가는 앞으로 어쩌려고 이리 극단적으로 폐허를 드러낸 것일까? 더군다나 자신이 기존 작업에서 다뤄온 것들을 허무하게 해체해 버리다니, 그다음 작업을 어떻게 하려는 것일까? 당시의 의문은 안성석이란 작가를 역사와 동시대라는 거시적 시간대와 서사 구조에서 탈출 혹은 유보하는 사건으로 내게 남았다.

이 영상은 <불완전 해체>란 작업으로, 2014년 VR 버전 이후 2016년에 게임 형식으로 제작되었다. 무기력하게 떠오른 두 개의 역사적 상징은 동시대 한국의 불안한 사회상과 지정학적 혼란을 암시한다. 하나는 복원된 전통으로 오늘날 광장을 상징하는 역사가 되었고, 또 하나는 시청각적 생중계로 폭파되어 전 국민에게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각인된 사라진 이미지이다. 두 상징의 비현실적인 위상은 파괴와 재건에 의한 진보의 역사관을 되묻고 있는데, 내게는 유난히도 이 작업이 자기-고백적인 어조로 다가왔다. 미래에 대한 막연함, 어찌할 수 없는 폐허 속에서 스스로 말할 수 없음을 고백하고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구조의 모순과 집단 속 개인의 간극은 그가 작업에서 지속적으로 질문해 왔던 것이다. 군중, 광장의 장소성과 역사적 상징이 어김없이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명확하지 않은 그 먹먹함이란. 상징화할 수 없기에 등장한 실패로서의 폐기(forclusion)라 할까. 만약 이것이 시대의 파국을 묘사하는 방식이라면 관객이 보고 싶어 하는 이미지는 분명 아닐 것이다. 어떠한 사건이나 재현도 없이 오로지 불온한 분위기에 참여하도록 유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관객이 조이스틱을 작동시켜야만 움직이는 시선은 참여의 무능함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아무리 움직여도 변치 않는 황량한 땅, 서사의 부재는 무력감을 더한다. 참여의 과정은 개입 불가능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유희적 경험이 되길 거부하고, 현장에 개입된 시선은 비윤리적인 구경꾼이 되어 파국의 현장을 무능하게 바라볼 뿐이다.

지각의 조건 : 광학과 촉각 사이, 근경과 원경 사이

역사와 기억의 문제로부터 세계를 어떻게 지각하는가에 대한 안성석의 질문은 그가 다루는 매체적 환경과 기술적 전환과 맞물려 왔다. 급변하는 동시대와 이를 지각하는 구조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사진 매체에서 시작하여 이후 애니메이션, 가상현실, 컴퓨터 게임 설계로 전개되어 왔다. 사진과 게임 사이, 두 매체는 각기 원격성과 근접성 사이의 이슈를 담는다. 그의 초기작인 <역사적 현재>(2009-2013)는 2차원의 프레임 안으로 과거의 시간을 오버랩한 사진 작업으로, 동시대성에 대한 지극한 고민이 담긴다. 여기서 사진 매체는 프로젝터가 비추는 과거의 장면을 현재의 시간으로 수렴한다. 이후 3D 모델링 애니메이션, 게임 프로그래밍을 통해 작가는 사진 매체에서 재현할 수 없었던 영역을 실험해오고 있다. 대상과의 거리감을 본다면, 게임에서는 사진의 기계적 시선을 관통하며 시선의 영역을 근접한 경험으로 제시해 보인다. 2012년의 개인전 《사적경험》에서 1인칭 시점으로 광장을 누비는 장면이 시도된 이후, 그다음 해에 선보인 2013년의 개인전 《관할 아닌 관할》에서는 VR 기기와 조이스틱을 통해 관람자로 하여금 광장에서 부산하게 움직이는 경찰관들 사이로 참여하게끔 독려한다. 그의 작업에서 광학적 공간과 촉각적 세계가 만나는 순간은 이때를 기점으로 현재까지 강화되어오고 있다.

이러한 광학과 촉각의 만남은 사실 초기의 사진 작업에서부터 암시된 것이다. 프로젝터가 가정용으로 보급될 시점에 작가가 이를 가지고 밖으로 나가 영사를 시도한 것은 매체적인 실험과 더불어 공공영역에서의 사적인 영역, 공공장소에서 배제된 기억을 투영하고자 하는 의지를 반영한다. 작가는 영사의 구조를 통해 과거의 이미지를 현실로 복귀하고, 시간의 범주를 투영된 이미지로까지 벌려 둔다. 이러한 맥락은 이후의 영상 및 게임 작업에서도 끊임없이 발견된다. 가상의 여행을 권하고 있는 <권할만한 여행>(2013)의 초입 부분에서는 극장이란 건축공간이 직접 등장한다. 이 가상의 극장은 사적 영역에 잠재된 집단적 무의식이 반영된 공간이다. 극장의 모티브는 최근 작업에 와서 관객과 시공간을 공유하는 현실적인 무대로 확장돼 오고 있다. 예를 들어, 파국에 연루된 집단의 움직임을 차갑게 묘사한 <군중의 지혜>(2017)에서는 일본식 코다츠가 있는 따뜻한 방을 두어 관객을 시각의 장으로 끌어들였으며, 이후 <타이어링>(2018)에서는 주행 시뮬레이터를 통해 신체와 시각의 경험을 긴밀하게 연동시킨다. 이때의 경험은 단순한 체험을 향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적으로 경험할 수 없는 세계로의 지각과 사유를 향한다. <타이어링>에 등장하는 주행 차량의 앞유리에서는 끝없는 신도시 풍경이 펼쳐진다. 여기서 작가의 태도를 대변하는 것은 창문의 구석에 있는 작은 백미러이다. 이전의 풍경을 먼지더미로 보여주는 백미러는 가속에 의해 한없는 잊혀져가는 시간대를 기억하게 한다. 게임 속 백미러는 과거의 시간을 투영하는 영사기로, 진보의 역사관이 망각한 역사의 시간성을 되묻는다. 이렇게 근경은 가장 불확실하고 불확정적인 풍경으로 우리 눈앞을 지나간다. 방향을 급선회하는 순간 그 먼지더미는 함께 해쳐 나가야갈 할 현재, 혹은 도래할 미래로 언제든 뒤바뀔 수 있다.

먼지더미와 백미러의 시간 속으로

신작 <나는 울면서 태어났지만, 많은 사람들은 기뻐했다>(2019)는 안성석의 작업에서 먼지더미처럼 남겨져 온 주변부에 있는 기억과 시간을 다룬다. 그의 작업에서 잘 드러나지 않았으나 공간적 요소로 지속되어 온 영사 구조, 사적 극장, 백미러의 시간이 확장되는 자리이다. 이번 작업에서 작가는 자전적인 스토리로 작가로서의 십년, 그 가속의 시간 속에서 돌진해온 자기를 성찰하고, 그 주변부에서 희미하게 남겨 뒀던 것들에 대화를 요청한다. 강아지, 할머니, 가족, 지인 등 묻혀 있던 기억과 십년의 시간을 담담히 고백하여 친구, 동료, 그리고 새로운 관객에게 다가가고자 한다. 이러한 맥락은 <내가 사는 세계>, 2018년의 개인전《따가워》의 연장선에 있다. 자신이 소망해온 가상의 건축공간을 구축한 <내가 사는 세계>에서는 기존 작업과는 달리 작가의 독백이 등장한다. 영상을 마주하여 헤드셋을 끼면 나른한 혹은 피곤한 듯 힘은 없으나 부드럽게 속삭이는 작가의 목소리가 십여 분간의 여정을 동행한다. 이곳에서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의 개념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유년기에 좋아하던 공간부터 아끼던 사물들, 가보고 싶은 망망대해까지 파편적인 이미지들이 얽혀 혼재된 시간으로 관객을 이끈다. 이때 동일시하기 쉽지 않은 이미지를 매개하는 것은 촉각적으로 다가오는 작가의 목소리이다. 목소리의 신체성을 통해 원격의 거리감을 좁혀나가면서 작가는 자신이 상상한 공간으로 관객을 참여시킨다.

기억의 파편들이 몽타주 된 시공간으로의 여행을 유도하는 작가의 독백은 우리를 어디로 이끄는 것일까? <나는 울면서 태어났지만, 많은 사람들은 기뻐했다>에서 이러한 질문은 작업의 내용과 구성 방식 모두에 걸쳐 주요하게 대두된다. 극장형 무대는 기존의 일인용 극장 혹은 사적 극장의 형식이 확장된 것으로, 사람들이 한자리에서 함께 시간을 공유하는 공간으로 마련된다. 시간을 공유하는 방식은 2016년 폐허의 세계로 관객을 초대한 장면과도 오버랩 될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작업이 종료되지 않는 파국의 시간으로 우리를 이끌었다면, 이번 작업은 그 끝에서의 응시가 아니라 끝에서의 대화를 권유한다. 백미러, 그림자, 눈부신 빛, 바람에 흔들리는 불규칙한 풍선, 차갑지 않은 반짝거림, 온기와 눈의 따가움, 그리고 이를 바라보고 느끼는 우리가 함께 한자리에 앉아있는 것. 관객은 그간 안성석의 작업에서 파편적이고 주변부적으로 등장했던 인상들로 이뤄진 먼지더미의 시간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작가는 이렇게 동시대의 속도로부터 증폭되는 무관심과 거리감을 반성하며, 함께 느끼고 경험할 공동의 극장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영화의 시간을 백미러의 은유를 통해 통찰한 영화비평가 세르주 다네(Serge Daney)의 글귀로 이 글의 마무리를 대신하고자 한다. “우리가 출발했던 곳과는 다른 풍경으로 우리를 데려가 길 잃게 하고, 우리 삶의 프레임이자 전설이 되었던 쉼 없이 계속되는 나선적 효과가 수반하는 현기증일 뿐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작업에서 함께 길을 잃고, 먼지더미의 현기증 속에서 시간을 연장시키는 사건들이 이어지길 소박하게나마 바래본다.

심소미 (독립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