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_주체가 아니라, 객체가 되어보자

박재용(워크온워크) www.workonwork.org

전시 제목에 쓰인 “Open Path”는 ‘열린 상태의 경로’를 의미하는 말로, “무한대 게임(infinite game)”이라는 개념을 연상케 한다. “무한대 게임”이란 오늘날 유행하는 WOW(월드오브워크래프트) 등의 온라인 롤플레잉게임 등을 설명하는 개념으로, 특별한 제약이 없는 게임 속 세계를 유저의 자유의지에 따라 돌아다니고 상호작용할 수 있는 형태의 게임을 일컫는다. 이번 전시를 위해 작가는 세 개의 세계를 구축하였고, 관람객-유저는 서울 워크온워크 오피스에 설치된 다양한 형태의 접속 터미널로 작가가 만든 가상 세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다.

작가가 구축한 세계에는 해저 공간과 송수신탑, 송전탑과 전투경찰, 미 대사관이 존재하며, 게임의 유저가 된 관람객은 마치 길을 잃은 NPC(Non-Player Character, 게임 안에서 컴퓨터가 조작하는 자동화된 캐릭터)가 된 양 거대한 세계 안을 돌아다니며, 마치 영화 <매트릭스>의 스미스 요원을 연상케 하는 수많은 작가의 분신을 마주하게 된다(이들은 모두 서울 시내 역사적 유적 근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광색 경찰 제복을 입고 있다).

얼핏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한 장소인 듯 보이는 작가의 세계 안에서, 게임의 유저가 된 관람객들은 주체가 아니라 객체로 변한다. 이로서 작가가 구축한 세계는 객체 지향적(Object-oriented, 컴퓨터 프로그래밍 패러다임의 하나로, 프로그램이 명령어의 목록이 아닌 독립된 단위의 모임으로 여긴다) 공간으로 변모한다. 안성석은 작가로 활동을 시작한 시절부터 꾸준히 관심을 보인 역사적 공간과 역사에 대한 재현, 오늘날 그러한 공간을 지키고 선 권력의 상냥한 얼굴과 그 뒷모습, 그 안에 존재하는 주체와 객체의 문제를 프로그래밍 코드로 치환하여 수원의 작업실에 설치한 서버에 심어두고, 서울의 워크온워크 사무실에서는 소스코드에 접근할 수 있는 터미널을 구축해 일종의 인터페이스를 구현한다.

따라서, 한 달 동안의 전시 기간 동안, 10여년 간 주거 공간으로 사용된 뒤 큐레이터와 작가들을 위한 작은 공간으로 탈바꿈한 워크온워크 오피스는 물리적 현실 안에 존재하는 비물리적 요건들을 비물리적인 방식으로 재현한 작가의 작업을 다시 물리적으로 치환한 일종의 접속-터미널로 변하게 된다. 관람객-유저들은 작가가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내려받아 본인의 집에서도 작가가 구축한 세계에 접속할 수 있다. 단, 서버 용량의 한계로 한 번에 15명 이상의 사용자 접속은 제한된다. 전시가 이뤄지는 워크온워크 오피스 거실에서는 객체가 된 유저-관람객이 작가가 만든 세계 속을 헤매는 모습을 관람할 수 있다.

(2013년 11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