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자(미학, 명지대 겸임 조교수)

안성석은 이전까지의 작업에서 우연히 한 장소에서 느껴지는 ‘데자뷰’ 현상처럼 돌발적으로 생기는 자신의 특유한 체험을 한 장의 사진에 두 개의 공간을 합성 혹은 병치시키면서 잠재적으로 공존하는 것들을 가시화 시키는 작업을 일관성 있게 해왔다.
2009년도 SeMA 프로그램에 선정되어 기획된 는 작가가『조선고적도보』, 혹은 개인이나 미군들이 소장했던 자료들에서 직접 찾아 낸 역사적인 유적지들의 흑백 사진을 현존하는 문화재에 병치되도록 스크린을 설치하고 과거의 사진 이미지를 투사한 후 작가 자신이 참여하며 촬영한 퍼포먼스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안성석의 작품 3가지, 즉 같은 장소지만 시간대를 달리하는 문화재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과거의 역사적인 흔적을 증명하는 사진을 찾아서 현재의 풍경에 연접시키는 제스처, 빔 프로젝터로 투영한 스크린의 영상을 실재 공간의 유적들과 일치하도록 맞춘 몽타주 작업, 과거와 현재를 지속하는 시간의 흐름 혹은 공존이란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다.
첫 번째로, 역사적인 현장의 서로 다른 두 시간 대를 병치시키면서 공적인 기억과 사적인 기억을 연결시키는 이와 같은 작가의 몸짓은 사진을 찍기 위해 프래이밍과 포커싱에 필요한 일반적인 촬영 행위에서 확장된 개념적인 행위인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빨리 변화해 가는 도시 풍경 속에 삽입된 과거의 역사적인 현장을 바라보고 있는 작가의 현전은 지나간 과거와 현재, 미래의 매개자 혹은 지속하는 역사의 증언자이다.

두 번째로, 아카이브적인 증명사진 혹은 개인의 기념사진이 스크린에 투영된 순간현재의 모습과 절묘하게 맞춰진 몽타주의 효과에 대해서 살펴봐야한다. 영화 편집방식의 하나인 몽타주는 이미지들의 연속이 총계가 아닌 ‘새로운 실재성’을 창조하며 그 속에서 삶들의 공존재, 동시성을 느끼게 해준다. 특히 다다이스트들에 의해 예술의 순수한 원작성과 사회를 비판하기 위해 활용된 포토몽타주가 이질적인 장면들을 중첩, 병치시키면서 혼란스럽고 해체된 세계의 모습을 충격적으로 고발하는데 효과적이었다면, 에서 스크린의 검은 틀로 단절된 컬러와 흑백 사진의 대조는 연속되는 장소에서 분리된 시간의 차이가 시선의 통일성을 깨고 새로운 완결성으로 종합되려는 움직임을 파괴하면서 완결되지 않는 미규정적인 의미를 생산하는데 효과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현존하는 풍경 속에 문화재가 지닌 존재론적으로 결정된 의미보다는 시간의 흐름과 상황 속에서 재 조직화하는 역사적인 정체성에 대한 탐색이라고 볼 수 있다.

세 번째로, 컬러와 흑백, 과거와 현재의 대비로 병치된 사진들에서 변화된 세월의 무상함에도 불구하고 “그 때 거기에 존재했었음”이란 부정할 수 없는 절대적인 과거는 작가와 함께 살아 숨쉬는 “지금 여기”에 공존함을 보여준다. 베르그손은 시간이란 지속적인 흐름으로 단절된 현재는 볼 수 없고 과거와 미래로 잠식하며 계속 변하는 지속적인 흐름으로서 현재에는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고 과거와 미래로 분산되는 현실적인 시간은 잠재적인 시간과 공존한다고 보았다. 현재란 오로지 개개인의 주체에 의해 질적으로 독특하게 경험되는 것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비록 정지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우리의 기억을 통해 과거와 현재는 상호침투하기 때문에 시간은 과거 현재가 서로 영향을 주면서 매시간이 새롭게 창조되며 미래로 지속한다고 볼 수 있다.

스크린위에 흑백사진을 투영시키는 빔 프로젝터의 빛은 , 폴 비릴리오(P.Virilio)가 미세한 뇌신경 발작 같은 “피크노렙시(picnolepsie,기억 부재증)” 현상을 일으키며 관람자의 의식을 균열시켜 환영을 볼 수 있다고 지적했듯이, 과거의 역사와 현실의 상황이 상호 작용하면서 사회적이고 집단적인 기억을 떠올리게도 하지만 과거와 현재는 잠재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의 불분명하고 모호한 공존 속에서 잠재적인 기억들을 솟아오르게 해준다. 무의식 속에 침잠해 있던 개인의 고유한 기억들을 상기시키는 가운데, 현실적인 상황과 잠재적인 것이 충돌하는 순간 불분명한 경계 속에서, 들뢰즈가 말했듯이, “비물질적인 사건”들을 체험하게 해준다. 즉 사진기에 의한 기계적인 전이가 만들어 내는 시간의 변화는 지속적인 흐름에 균열을 내어 응축되고 긴장된 것이 드러날 수 있다. 같은 장소이지만 스크린의 틀에 의한 시간적인 균열은 선형적인 시간의 흐름을 깨고 잠재적인 무엇인가가 솟아나게 해준다. 과거에서 현재로 진행하는 시간의 지속은 작가 혹은 관람자의 기억을 통해 다시 현재에서 과거로 올라가는 순수 기억을 통해 과거와 현재는 선형적이지 않는 양방향으로 작용하면서 시간의 질적 비약 속에서 다양한 체험들이 가능해진다. 정지된 역사의 한 순간이 촬영으로 인해 탈 서사화되어 재구성된 장면들, 즉 불에 타원형을 상실했던 팔달문 혹은 해태상과 북한산 사이에 버티고 선 광화문, 화재로 소실되어 새로이 복원 중인 숭례문, 수학여행 온 학생들에 둘러싸인 첨성대, 질주하는 자동차의 불빛 궤적 뒤로 보이는 경성역 등은 한일 합방, 독립운동, 6.25 전쟁 등으로 파란만장했던 대한민국의 근대사로부터 사진 이미지 없이는 상상할 수도 없는 현대의 하이테크놀로지의 시대로의 확연한 변화도 읽어낼 수 있다. 작가가 과거의 정지된 한 순간을 끼워 넣은 몽타주 작업은 현재 진행 중인 삶의 변화 속에 부재하는 과거가 현대의 첨단 과학 문명 속에서도 계속 지속하며 새로운 것들이 생겨날 수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동이 트거나 해가 저무는 현실의 배경 속에 재구성된 과거는 이미 과거 자체가 아니라 어떤 창조적인 흐름처럼 새로운 역사를 일구면서 모노크롬으로 치환된 역사적인 증거물들은 전환된 문맥으로 편입되어 관람자로 하여금 새로운 체험을 할 수 있도록 해준다.

작가가 작업 후에 같은 장소에서 다시 촬영한 것으로 전시장 입구에 설치되었던 텔레비전 동영상에서 볼 수 있는 문화재 주변의 일상은 자신이 작업했던 시간도 이미 지나 간 과거 속으로 사라져서 부재하지만 여전히 현재, 미래의 작업으로 지속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한 것이다. 결국 현재와 과거, 기억과 망각, 현존과 부재를 연결시켜 주는 스크린을 설치하고 과거 속으로 자신을 투영시키면서 던진 질문들은 한국인으로서 동시대의 문화적인 정체성은 물론 작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묻는 행위였다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사진과 동영상, 작가의 몸을 연결시키는 제스처는 사회적인 기억을 통해 관람자 개개인의 무의식에 존재하는 잠재적인 것을 순간적으로 독특하고 우연적인 사건처럼 질적으로 다양하게 체험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또한 행위와 스틸 사진, 동영상이란 적극적인 매체 혼합을 모색하며 생생한 현장성과 편집된 시간성을 통해 과거, 역사와 현재 그리고 미래와의 말 걸기를 밀도 있게 보여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