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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 Article

사적 기억에서 공동의 시간으로
파국 이후

심소미 (독립 큐레이터)

3년 전 어느 전시장이었다. 잿더미가 된 풍경을 향해 조이스틱을 움직여 시선을 이동해 본다. 화염과 지진이 휩쓸고 간 불온한 땅, 모든 것이 폐허가 되어버린 이 장소에는 두 개의 거대한 상징만이 남아 허공을 부유한다. 중력에의 저항력을 상실한 광화문과 조선총독부 건물, 이에 더해 그나마 형체를 알아볼 수 있는 것은 부서진 바리케이드뿐이다. 지진으로 갈라지는 땅이 품은 화염은 아직 이 파국이 끝나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시선은 이곳을 배회하지만 불길하게 갈라진 땅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흔적도 찾을 수 없다. 이 작가는 앞으로 어쩌려고 이리 극단적으로 폐허를 드러낸 것일까? 더군다나 자신이 기존 작업에서 다뤄온 것들을 허무하게 해체해 버리다니, 그다음 작업을 어떻게 하려는 것일까? 당시의 의문은 안성석이란 작가를 역사와 동시대라는 거시적 시간대와 서사 구조에서 탈출 혹은 유보하는 사건으로 내게 남았다. 

이 영상은 <불완전 해체>란 작업으로, 2014년 VR 버전 이후 2016년에 게임 형식으로 제작되었다. 무기력하게 떠오른 두 개의 역사적 상징은 동시대 한국의 불안한 사회상과 지정학적 혼란을 암시한다. 하나는 복원된 전통으로 오늘날 광장을 상징하는 역사가 되었고, 또 하나는 시청각적 생중계로 폭파되어 전 국민에게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각인된 사라진 이미지이다. 두 상징의 비현실적인 위상은 파괴와 재건에 의한 진보의 역사관을 되묻고 있는데, 내게는 유난히도 이 작업이 자기-고백적인 어조로 다가왔다. 미래에 대한 막연함, 어찌할 수 없는 폐허 속에서 스스로 말할 수 없음을 고백하고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구조의 모순과 집단 속 개인의 간극은 그가 작업에서 지속적으로 질문해 왔던 것이다. 군중, 광장의 장소성과 역사적 상징이 어김없이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명확하지 않은 그 먹먹함이란. 상징화할 수 없기에 등장한 실패로서의 폐기(forclusion)라 할까. 만약 이것이 시대의 파국을 묘사하는 방식이라면 관객이 보고 싶어 하는 이미지는 분명 아닐 것이다. 어떠한 사건이나 재현도 없이 오로지 불온한 분위기에 참여하도록 유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관객이 조이스틱을 작동시켜야만 움직이는 시선은 참여의 무능함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아무리 움직여도 변치 않는 황량한 땅, 서사의 부재는 무력감을 더한다. 참여의 과정은 개입 불가능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유희적 경험이 되길 거부하고, 현장에 개입된 시선은 비윤리적인 구경꾼이 되어 파국의 현장을 무능하게 바라볼 뿐이다.

 
지각의 조건 : 광학과 촉각 사이, 근경과 원경 사이 
 역사와 기억의 문제로부터 세계를 어떻게 지각하는가에 대한 안성석의 질문은 그가 다루는 매체적 환경과 기술적 전환과 맞물려 왔다. 급변하는 동시대와 이를 지각하는 구조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사진 매체에서 시작하여 이후 애니메이션, 가상현실, 컴퓨터 게임 설계로 전개되어 왔다. 사진과 게임 사이, 두 매체는 각기 원격성과 근접성 사이의 이슈를 담는다. 그의 초기작인 <역사적 현재>(2009-2013)는 2차원의 프레임 안으로 과거의 시간을 오버랩한 사진 작업으로, 동시대성에 대한 지극한 고민이 담긴다. 여기서 사진 매체는 프로젝터가 비추는 과거의 장면을 현재의 시간으로 수렴한다. 이후 3D 모델링 애니메이션, 게임 프로그래밍을 통해 작가는 사진 매체에서 재현할 수 없었던 영역을 실험해오고 있다. 대상과의 거리감을 본다면, 게임에서는 사진의 기계적 시선을 관통하며 시선의 영역을 근접한 경험으로 제시해 보인다. 2012년의 개인전 《사적경험》에서 1인칭 시점으로 광장을 누비는 장면이 시도된 이후, 그다음 해에 선보인 2013년의 개인전 《관할 아닌 관할》에서는 VR 기기와 조이스틱을 통해 관람자로 하여금 광장에서 부산하게 움직이는 경찰관들 사이로 참여하게끔 독려한다. 그의 작업에서 광학적 공간과 촉각적 세계가 만나는 순간은 이때를 기점으로 현재까지 강화되어오고 있다. 
 이러한 광학과 촉각의 만남은 사실 초기의 사진 작업에서부터 암시된 것이다. 프로젝터가 가정용으로 보급될 시점에 작가가 이를 가지고 밖으로 나가 영사를 시도한 것은 매체적인 실험과 더불어 공공영역에서의 사적인 영역, 공공장소에서 배제된 기억을 투영하고자 하는 의지를 반영한다. 작가는 영사의 구조를 통해 과거의 이미지를 현실로 복귀하고, 시간의 범주를 투영된 이미지로까지 벌려 둔다. 이러한 맥락은 이후의 영상 및 게임 작업에서도 끊임없이 발견된다. 가상의 여행을 권하고 있는 <권할만한 여행>(2013)의 초입 부분에서는 극장이란 건축공간이 직접 등장한다. 이 가상의 극장은 사적 영역에 잠재된 집단적 무의식이 반영된 공간이다. 극장의 모티브는 최근 작업에 와서 관객과 시공간을 공유하는 현실적인 무대로 확장돼 오고 있다. 예를 들어, 파국에 연루된 집단의 움직임을 차갑게 묘사한 <군중의 지혜>(2017)에서는 일본식 코다츠가 있는 따뜻한 방을 두어 관객을 시각의 장으로 끌어들였으며, 이후 <타이어링>(2018)에서는 주행 시뮬레이터를 통해 신체와 시각의 경험을 긴밀하게 연동시킨다. 이때의 경험은 단순한 체험을 향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적으로 경험할 수 없는 세계로의 지각과 사유를 향한다. <타이어링>에 등장하는 주행 차량의 앞유리에서는 끝없는 신도시 풍경이 펼쳐진다. 여기서 작가의 태도를 대변하는 것은 창문의 구석에 있는 작은 백미러이다. 이전의 풍경을 먼지더미로 보여주는 백미러는 가속에 의해 한없는 잊혀져가는 시간대를 기억하게 한다. 게임 속 백미러는 과거의 시간을 투영하는 영사기로, 진보의 역사관이 망각한 역사의 시간성을 되묻는다. 이렇게 근경은 가장 불확실하고 불확정적인 풍경으로 우리 눈앞을 지나간다. 방향을 급선회하는 순간 그 먼지더미는 함께 해쳐 나가야갈 할 현재, 혹은 도래할 미래로 언제든 뒤바뀔 수 있다. 

 먼지더미와 백미러의 시간 속으로 
신작 <나는 울면서 태어났지만, 많은 사람들은 기뻐했다>(2019)는 안성석의 작업에서 먼지더미처럼 남겨져 온 주변부에 있는 기억과 시간을 다룬다. 그의 작업에서 잘 드러나지 않았으나 공간적 요소로 지속되어 온 영사 구조, 사적 극장, 백미러의 시간이 확장되는 자리이다. 이번 작업에서 작가는 자전적인 스토리로 작가로서의 십년, 그 가속의 시간 속에서 돌진해온 자기를 성찰하고, 그 주변부에서 희미하게 남겨 뒀던 것들에 대화를 요청한다. 강아지, 할머니, 가족, 지인 등 묻혀 있던 기억과 십년의 시간을 담담히 고백하여 친구, 동료, 그리고 새로운 관객에게 다가가고자 한다. 이러한 맥락은 <내가 사는 세계>, 2018년의 개인전《따가워》의 연장선에 있다. 자신이 소망해온 가상의 건축공간을 구축한 <내가 사는 세계>에서는 기존 작업과는 달리 작가의 독백이 등장한다. 영상을 마주하여 헤드셋을 끼면 나른한 혹은 피곤한 듯 힘은 없으나 부드럽게 속삭이는 작가의 목소리가 십여 분간의 여정을 동행한다. 이곳에서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의 개념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유년기에 좋아하던 공간부터 아끼던 사물들, 가보고 싶은 망망대해까지 파편적인 이미지들이 얽혀 혼재된 시간으로 관객을 이끈다. 이때 동일시하기 쉽지 않은 이미지를 매개하는 것은 촉각적으로 다가오는 작가의 목소리이다. 목소리의 신체성을 통해 원격의 거리감을 좁혀나가면서 작가는 자신이 상상한 공간으로 관객을 참여시킨다. 

 기억의 파편들이 몽타주 된 시공간으로의 여행을 유도하는 작가의 독백은 우리를 어디로 이끄는 것일까? <나는 울면서 태어났지만, 많은 사람들은 기뻐했다>에서 이러한 질문은 작업의 내용과 구성 방식 모두에 걸쳐 주요하게 대두된다. 극장형 무대는 기존의 일인용 극장 혹은 사적 극장의 형식이 확장된 것으로, 사람들이 한자리에서 함께 시간을 공유하는 공간으로 마련된다. 시간을 공유하는 방식은 2016년 폐허의 세계로 관객을 초대한 장면과도 오버랩 될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작업이 종료되지 않는 파국의 시간으로 우리를 이끌었다면, 이번 작업은 그 끝에서의 응시가 아니라 끝에서의 대화를 권유한다. 백미러, 그림자, 눈부신 빛, 바람에 흔들리는 불규칙한 풍선, 차갑지 않은 반짝거림, 온기와 눈의 따가움, 그리고 이를 바라보고 느끼는 우리가 함께 한자리에 앉아있는 것. 관객은 그간 안성석의 작업에서 파편적이고 주변부적으로 등장했던 인상들로 이뤄진 먼지더미의 시간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작가는 이렇게 동시대의 속도로부터 증폭되는 무관심과 거리감을 반성하며, 함께 느끼고 경험할 공동의 극장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영화의 시간을 백미러의 은유를 통해 통찰한 영화비평가 세르주 다네(Serge Daney)의 글귀로 이 글의 마무리를 대신하고자 한다. “우리가 출발했던 곳과는 다른 풍경으로 우리를 데려가 길 잃게 하고, 우리 삶의 프레임이자 전설이 되었던 쉼 없이 계속되는 나선적 효과가 수반하는 현기증일 뿐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작업에서 함께 길을 잃고, 먼지더미의 현기증 속에서 시간을 연장시키는 사건들이 이어지길 소박하게나마 바래본다.


에세이_주체가 아니라, 객체가 되어보자 (2013년 11월 21일)

박재용(워크온워크) www.workonwork.org 

 전시 제목에 쓰인 “Open Path”는 ‘열린 상태의 경로’를 의미하는 말로, “무한대 게임(infinite game)”이라는 개념을 연상케 한다. “무한대 게임”이란 오늘날 유행하는 WOW(월드오브워크래프트) 등의 온라인 롤플레잉게임 등을 설명하는 개념으로, 특별한 제약이 없는 게임 속 세계를 유저의 자유의지에 따라 돌아다니고 상호작용할 수 있는 형태의 게임을 일컫는다. 이번 전시를 위해 작가는 세 개의 세계를 구축하였고, 관람객-유저는 서울 워크온워크 오피스에 설치된 다양한 형태의 접속 터미널로 작가가 만든 가상 세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다. 

 작가가 구축한 세계에는 해저 공간과 송수신탑, 송전탑과 전투경찰, 미 대사관이 존재하며, 게임의 유저가 된 관람객은 마치 길을 잃은 NPC(Non-Player Character, 게임 안에서 컴퓨터가 조작하는 자동화된 캐릭터)가 된 양 거대한 세계 안을 돌아다니며, 마치 영화 <매트릭스>의 스미스 요원을 연상케 하는 수많은 작가의 분신을 마주하게 된다(이들은 모두 서울 시내 역사적 유적 근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광색 경찰 제복을 입고 있다). 

 얼핏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한 장소인 듯 보이는 작가의 세계 안에서, 게임의 유저가 된 관람객들은 주체가 아니라 객체로 변한다. 이로서 작가가 구축한 세계는 객체 지향적(Object-oriented, 컴퓨터 프로그래밍 패러다임의 하나로, 프로그램이 명령어의 목록이 아닌 독립된 단위의 모임으로 여긴다) 공간으로 변모한다. 안성석은 작가로 활동을 시작한 시절부터 꾸준히 관심을 보인 역사적 공간과 역사에 대한 재현, 오늘날 그러한 공간을 지키고 선 권력의 상냥한 얼굴과 그 뒷모습, 그 안에 존재하는 주체와 객체의 문제를 프로그래밍 코드로 치환하여 수원의 작업실에 설치한 서버에 심어두고, 서울의 워크온워크 사무실에서는 소스코드에 접근할 수 있는 터미널을 구축해 일종의 인터페이스를 구현한다. 

 따라서, 한 달 동안의 전시 기간 동안, 10여년 간 주거 공간으로 사용된 뒤 큐레이터와 작가들을 위한 작은 공간으로 탈바꿈한 워크온워크 오피스는 물리적 현실 안에 존재하는 비물리적 요건들을 비물리적인 방식으로 재현한 작가의 작업을 다시 물리적으로 치환한 일종의 접속-터미널로 변하게 된다. 관람객-유저들은 작가가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내려받아 본인의 집에서도 작가가 구축한 세계에 접속할 수 있다. 단, 서버 용량의 한계로 한 번에 15명 이상의 사용자 접속은 제한된다. 전시가 이뤄지는 워크온워크 오피스 거실에서는 객체가 된 유저-관람객이 작가가 만든 세계 속을 헤매는 모습을 관람할 수 있다. 


Article 2013년 12월호 Review
당신은 플레이어인가? NPC인가?

한때 시대를 풍미한 '슈퍼마리오' 게임을 하면서 주인공  '마리오'가 아닌 악당'버섯'의 입장에 서 본 일이 있는가? 물론 게임은 가상의 공간안에서 이루어지지만, 플레이를 누른 직후부터 캐릭터에 자신의 인격을 이입하게 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버섯'악당 같은 NPC(Non-Player Character, 게임안에서 컴퓨터가 조작하는 자동화된 캐릭터)는 그저 물리치거나, 미션을 전달하는, 시쳇말로 영혼 없는 '타자'이거나 배경으로서만 존재한다. 이러한 게임의 구조와 문법을 적극 활용한 작품들을 선보이는 안성석의 개인전에는 <Open Path를 비롯해, 'LV Pylon','SF Pylon', 'Infinite game', 'Fall into an Abyss', 'Jail' 등이 전시되고 있다. 관객은 서울 워크온워크 오피스에 설치된 접속 터미널을 통해 작가가 만든 가상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이색적인 방식으로 작품에 접근하게 되어있다. 

여기에는 해저 공간, 송수신탑, 송전탑과 전투경찰, 미 대사관 등의 의미심장한 장소들이 배경으로 등장하는데, 게임 속 캐릭터가 된 관객은 작가가 구축해 놓은 거대한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형광색 경찰 제복을 착용한 작가의 분신들과 마주하게 된다. 주/객이 역으로 치환되어 관람객들이 NPC의 입장에 서게 되고, 작가의 분신이 도리어 주체로서 곳곳에 등장하는 것이다. 이로써 작가는 관람객이 주체로 참여하는 종전의 인터렉티브 아트의 '룰 뒤엎기'를 시도한다. 이어서 주객에 관련된 물음을 더욱 확장시켜 사회 속에서 우리 자아가 주/객으로서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으로 연결되도록 한다. 이 시대에 주목받는 새로운 미디어이자 즐길 거리인 게임의 가상공간과 문법을 적극 도입한 점은 새로운 접근과 성찰을 가능하게 한다.

가상현실과_증강현실(2010)

진중권(미학)

역사적 현재
 
가상-현실의 존재론적 유희를 벌인다는 점에서 안성석(1985- )의 작업 역시 한성필, 이명호와 같은 계열에 서 있는 듯이 보인다. 아직 대학을 채 졸업하지 못한 신예작가 역시 즐겨 사진에 프레임을 도입한다. 그 프레임은 프로젝터를 위한 이동식 스크린. 그 스크린 위에 투사되는 것은 작가가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報)>(1915-1930)에서 찾은 낡은 유적의 흑백사진이다. 작가는 현존하는 유적 앞에 스크린을 설치하고, 그 위에 그 유적의 과거모습을 중첩시킨 후 그것을 카메라에 담는다. 이로써 현재와 과거 사이에 가로 놓인 시각적 간극이 봉합되고, 현실의 유적에 잠재된 보이지 않는 과거의 기억이 가시화한다. 그런데 이 간단한 트릭이 관객에게 매우 착잡한 물음을 던진다.  

관계적 건축
안성석의 작품은 로자노 헤머(Rafael Lozano-Hemmer : 1967- )의 작업을 연상시킨다. 이 멕시코의 미디어 아티스트는 90년대부터 오디오-비주얼 프로젝션으로 현실의 건물이나 유적을 증강시키는 작업을 해 왔다. 가령 <폐위된 황제들>(1997)이라는 설치작품에서 작가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성의 벽면에 프로젝터로 멕시코에 있는 건물의 인테리어 사진을 투사한다 (‘폐위된 황제들’ 1997). 작품의 계기가 된 것은 합스부르크가의 맥시밀리언이 멕시코의 황제였고, 아즈텍 황제의 깃털왕관이 비엔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 폐위 당한 이 두 황제를 인연으로 그는 멀리 떨어진 두 문화의 기억을 하나로 합성한다. 이렇게 현실의 건축에 정보의 층위를 중첩시키는 것을 그는 ‘관계적 건축’(relational architecture)이라 부른다.  

‘관계적 건축’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이른바 ‘증강현실’의 기법이다. 보잉사의 엔지니어들은 항공기의 제작과 수리에 증강현실의 기술을 이용한다. 그들이 머리에 쓴 HMD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기계의 외면 위에 눈에 보이지 않는 기계의 내부구조가 와이어 프레임으로 중첩된다. 로자노-헤머의 ‘관계적 건축’은 현실에 정보의 층위를 겹쳐놓는 이 증강현실의 기술을 이용해 현실의 건물과 역사적 기억 사이의 관계를 설정한다. 현실의 유적에 역사적 기억을 겹쳐 놓는다는 점에서 안성석의 작업 역시 로자노-헤머가 말하는 ‘관계적 건축’으로 분류될 수 있다. 하지만 로자노-헤머가 그 일을 하는 데에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이용한다면, 안성석은 똑같은 구상을 철저하게 아날로그 방식으로 실현한다.

안성석의 작업은 물론 신세대의 미디어 체험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컴퓨터는 점점 작아지고 있다. 한때 커다란 방 전체를 채웠던 컴퓨터는 책상 위에 올려놓는 데스크톱, 무릎에 올려놓는 랩톱을 거쳐, 이제는 손바닥에 올려놓는 팜탑의 사이즈로 줄어들었다. 이는 컴퓨터를 휴대하고 다니며 언제 어디서라도 가상의 세계와 접속해 필요한 정보를 실시간으로 불러올 수 있게 됐음을 의미한다. “복제를 통하여 모든 사물의 일회적 성격을 극복하려는” 것이 사진의 시대에 대중이 가졌던 욕망이었다면, 디지털 시대의 대중은 현실의 대상을 보면 곧바로 그 위에 정보의 층위를 중첩시켜 놓으려는 성향을 갖고 있다. 안성석의 작업은 디지털 부족의 이 열렬한 욕망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문화적 기억의 시차(時差)
안성석의 작품에서 역사와 현재는 한 건축물 안에서 하나가 된다. 전시회의 카탈로그는 이에 대해 “합성된 시공간의 구축은 혼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의 감수성”이라 적었다. 실제로 거기에는 시간에 대한 새로운 세대의 관념이 반영되어 있다. 텍스트는 선형적으로 지각되나, 이미지는 공간적으로 지각된다. 문자문화 시대에 시간은 선형적이었지만, 영상문화의 시대에 시간의 선형성은 파괴된다.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시간을 클릭할 수 있는 공간으로 뒤바꾸어 놓았다. 이로써 시간의 비가역성도 약화된다. 과거는 영원히 회귀한다. 한 번의 클릭으로 과거와 현재의 정보와 나란히 놓이는 시대에는 역사와 현재가 한 건축물의 공간적 구조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하나로 합성된다.  

작가는 흑백의 과거와 색깔을 가진 현재의 윤곽을 정교하게 맞춰 놓았다. 이는 캔버스의 안과 밖의 윤곽을 일치시켜 놓곤 했던 마그리트의 작품을 연상케 한다. 마그리트에게 이 장치는 현실과 재현의 관계에 관한 철학적 물음을 던지는 방식이었다. 머리 ‘밖’의 세계와 머리 '속'의 관념은 과연 일치하는가? 그 일치를 확인하기도 하고 때로 부인하기도 하면서, 마그리트는 해결할 수 없는 근대철학의 아포리아를 회화적으로 표현한다. 안성석 역시 가상과 현실의 윤곽을 정교하게 짜 맞춘다. 하지만 안성석의 작품에서는 프레임의 안과 밖 사이에 수십 년의 시차(時差)가 존재한다. 이는 안성석이 던지는 것은 전혀 다른 물음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라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 속에서 우리는 어떠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역사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E. H. 카의 명제는 역사란 현재의 관점에서 끊임없이 다시 쓰인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 대화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안성석의 작품에서 흑백의 역사는 갑자기 색채를 가진 현재와 대화의 관계 속에 들어간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청동거울을 둘로 잘라, 이를 훗날 신분을 확인하는 증명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이것이 오늘날 ‘심볼’이라는 말의 어원이 된 ‘심발레인’(symbalein)이다. 안성석의 작품에서 과거와 현재는 마치 이 심발레인처럼 짝이 맞춰진다. 하지만 아무리 윤곽을 맞추어 놓아도 흑백의 기억과 색채의 현실은 서로 떨어지려 한다. 흑백과 칼라, 저해상과 고해상, 자연광과 인공광의 대조는 너무 현격하여, 이 인위적인 심발레인을 그것의 대립자인 ‘디아볼레인’(diabolein)으로 만든다.

하지만 형식적으로 눈에 거슬리는 이 균열이야말로 이 작품의 본질을 드러내는지도 모른다. 사실 과거와 현재의 대화는 노인과 청년 세대의 대화만큼이나 어려운 것이다. 예를 들어 실물과 사진을 위아래로 결합시킨 첨성대는 그 자체가 ‘청산하지 못한 과거’ 위에 억지로 ‘반성하지 않는 현재’를 올려놓은 이 나라의 모습처럼 보인다. 동시에 그것은 이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 즉 이 나라 역사학계의 상황으로 느껴진다. 대중의 의식 속에 든 ‘대한민국’의 기억은 서로 배척하는 식민사학과 민족사학, 근대사학과 탈근대사학의 균열을 억지로 봉합해 놓은 것에 가깝다. 안성석의 작품은 형식적 부정합을 통해 실은 이 나라의 공동체와 그것의 기억 자체가 부정합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드러낸다.

문화적 기억의 시차(視差)
여기서 시차(時差)는 동시에 시차(視差)로 드러난다. 작품에 사용된 흑백사진은 일제 때 조선총독부에서 제작한 <조선고적도보>에서 나온 것이다. 이 책을 만든 세키노 다다시[關野貞)는--비록 후에는 견해를 바꾸었다지만--조선의 미의식을 비하하던 이른바 ‘식민사학’의 대표자였다. 게다가 <조선고적도보>의 사진 자체가 분류학적으로는 제국주의 식민통치를 위한 사진에 속한다. 푸코의 말을 빌면 조선의 문화 유적에 대한 시각적 판옵티콘을 구축하려는 제국주의 권력의 시선이다. 때문에 과거와 현재, 사진과 실물을 결합시켜 놓은 안성석의 사진에서는 어쩔 수 없이 두 개의 시선이 교차하게 된다. 하나는 유적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며, 그것을 바라보는 제국주의적 ‘타자’의 시선이다.  

하지만 <조선고적도보>는 1916년 프랑스 학술원상을 받을 만큼 탁월한 학문적 업적으로 평가된다. 당시 조선에는 문화재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그나마 조선의 유적을 향한 유일한 시선은 제국주의 권력의 시선이었다. 그리하여 그가 찍은 사진들은 오늘날까지도 유적의 원형을 복원할 때에 반드시 참고해야 할 자료로 사용되고 있다. 세키노 다다시의 책은 일본의 탐욕스러운 수집가들이 문화재 약탈을 위한 리스트로 활용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일본인들에게 조선의 공예를 알리는 데에 커다란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한국의 근대화에서 식민주의자들의 역할에 관한 역사학계의 복잡한 논란이 보여주듯이, 종합에 이룰 수 없는 두 시선의 차이는 극복하기 어려운 것이다.  

로자노-헤머의 작업에서 정보는 현실을 증강하는 역할을 한다. 둘 사이에는 변증법적 종합이 이루어져, 벽면에 투사되는 정보로 인해 그 대립물인 현실은 더 풍부해진다. 하지만 안성석의 작업에서 정보의 층위와 현실의 층위는 서로 충돌한다. 즉 꿰어 맞춘 윤곽 속에서 현재의 건물과 과거의 기억은 억지로 ‘심발레인’이 되나, 저해상과 고해상의 현격한 시각적 대조를 통해 흑백의 기억과 현실의 건물은 ‘디아볼레인’이 되어 서로 떨어지려 한다. 마치 둥글게 굽은 화살대와 팽팽하게 당겨진 활줄처럼, 안성석의 작품에서 정보와 건물, 과거와 현재, 역사와 현실은 대립성을 그대로 유지한 채로 억지로 화해가 되어 있다. 슬라보이 지젝이라면 이를 ‘시차적 관점’(parallax view)이라 부를지도 모르겠다.

장승연_공존할 수 없는 시간들의 만남
과거-현재-미래, 공존할 수 없는 시간들의 만남 

장승연(미술사)

과연 지나간 ‘역사’와 지금의 ‘현재’가 공존하는 역설적인 순간이 존재할 수 있을까? 혹은 ‘내일’이라는 미래에 대하여 우리는 얼마만큼 예측할 수 있을까? 안성석의 대표작인 <역사적 현재>와 이번 전시를 위한 신작 <내일의 도덕>은 제목부터 묘하게도 ‘역사-현재-내일’의 시간성을 암시한다. 더불어 그의 작업은 공통적으로 어떤 특정 장소를 소재로 삼고 있다. 역사적 기념물부터 공공장소, 그리고 신도시까지 그는 자신의 발로 직접 그 장소를 찾으며 작업한다. 특정 장소에서의 경험, 그리고 시간성에 대한 암시에서 이 작가의 지속적인 관심사와 작업적 탐험을 이해할 중요한 줄기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역사적 장소와 디지털 꼴라주/ 사진 작업 시리즈인 <역사적 현재>에 담긴 피사체들은 주로 우리나라의 오래되고 유명한 장소들이다. 사진에 담긴 첨성대, 광화문, 남대문 같은 문화재들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역사’적 아이콘이다. 물론 동시에 지금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의 터전 속에서 지속적으로 소비되고 있는 ‘현재’의 장소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제 역사가 된 장소를 소재로, 삶이란 과거에서 오늘을 거쳐 내일을 향해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는 개념을 고유의 방식으로 표현했다. 그 장소 앞에 작은 스크린을 펼친 후 과거 기록사진을 영상으로 투사함으로써 현재 모습과 과거의 모습이 함께 겹쳐지는 순간을 다시 사진으로 촬영한 것이다. 이로써 작가는 ‘과거와 현재의 공존’, 즉 마치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철학적 수사 같은 상태를 디지털 매체를 활용한 작은 조작을 통해 효과적으로 이미지화한다. 그리고 현재의 풍경 안으로 과거의 풍경이 소환된 이 장면은 우리에게 ‘익숙하면서 낯선 풍경’ 그 자체로 다가온다.

매끄러운 표면으로 인화되어 있는 사진 이미지는 그 자체로 어떤 의미의 기표가 된다. 안성석의 사진을 보는 대부분의 관람객은 일견 어떤 보편적인 의미를 떠올릴 것이다. 아마도 그 것은 ‘역사’라는 무겁고 거창한 단어로 대신할 수 있을 것 같다. 작품에서 과거와 현재의 역설적인 묘한 공존을 보면서, 끊임없이 새 장을 쓰고 있는 역사라는 거대서사의 흐름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을 불현듯 깨닫게 되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 <역사적 현재> 속 장면들은 이처럼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시간의 일률적인 흐름, 즉 과거와 현재 그리고 다시 이어질 미래의 진행을 암시하는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마치 앞을 향해서 직진하고 있는 단선적인 흐름으로서의 시간 말이다. 하지만 작가 특유의 형식적 트릭, 즉 현재 장면 속에 과거의 이미지가 덧대어져 있는 디지털 꼴라주 방식은 새로운 의미망을 만들어 낸다. 각기 다른 바탕에서 비롯된 이미지를 파편화해 조합하는 꼴라주는 직선적이고 일반적인 바탕(시간성)을 깨뜨리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즉 작가가 디지털 꼴라주의 방식으로 과거와 현재의 이미지를 공존시키는 순간, 이 사진의 표면은 완결되고 보편적인 시간성(표면)을 잃어버린 셈이다.

경험, 시간성의 재조합/ 안성석 작가는 그 장소에 실제로 “있다”는 점이 작업의 가장 큰 핵심이자 사진이라는 매체의 큰 매력이라고 말한다. 작업을 하는 동안 우연히 마주치는 사람들, 그들의 반응, 그러한 소소한 만남 또한 작업에서 굉장히 중요한 경험으로 기억하는 것이다. 그의 또 다른 작업 <사적 경험>은 이러한 작가의 생각을 디지털 가상 세계 안에 표상한 작업이다. 작가는 광화문 광장이 완성된 후 그곳에서 느낀 인위적이고 낯선 개인적 느낌들을 채집하고자 휴대용 카메라를 사용했다. 이어서 이 사진들에 등장하는 사람과 건물 같은 다양한 요소들을 디지털로 오려서 입간판처럼 세워 놓은 가상의 공간을 만들었다. 광화문이라는 존재의 역사성과 공공성, 그리고 그곳을 현재 체험하는 개개인 각자의 경험이라는 두 개의 축이 함께 공존하는 이질적인 느낌을 디지털 가상의 꼴라주 세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이 작품을 기반으로, 관람자의 역할을 더욱 능동적으로 부여하고자 게임의 형식으로 새롭게 제작한 작업이 <관할 아닌 관할>이다. 여기서 작가는 게임이라는 방식이란 ‘꿈의 역사’,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말하는 꿈의 역사는 바로 역사적 사건과 개인적 사건들이 함께 흘러가며 맞물리는 그런 제3의, 혹은 제4의 역사를 말하는 것일 테다.

현대 철학은 시간성이라는 것이 일률적이고 일방적으로 앞을 향해 흐르는 것이 아님을 사유해 왔다. 그것은 거대서사 위주의 생각 속에서 희생되어 버리는 소서사에 대한 존중과 자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각기 다른 시간 속의 파편들을 모으고 결합시켜서 또다른 이질적인 시간성의 순간을 만들어 버리는 <역사적 현재>의 꼴라주 형식이 상기시키는 질문 또한 이와 관련된다. 역사라는 대서사의 흐름 위주로 우리는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예견하는 것에 익숙하지만, 사실 대서사의 흐름은 개개인의 작은 경험과 시간의 흐름이 하나둘 모이며 생겨나는 것이다. 역사적 시간과 개인의 경험이란 절대 분리하여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며 흐를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러한 시간성은 우리가 생각하듯이 일렬로 나란히 흐르는 그런 시간일 수 없다. <역사적 현재>에서 파편과 파편의 장면이 만나듯이, 우리는 그의 작품에서 시간성을 인식하되 보편적인 시간성과는 전혀 다른 것을 ‘경험’하게 된다.

신도시, 미래를 향한 현재의 모습들/ 역사와 현재를 거쳐, 안성석 작가의 새로운 작업은 이제 ‘미래’를 묻고 있다. 바로 이번 전시를 위해 촬영한 작업 <내일의 도덕>이다. 사진 속의 이미지들은 완공을 위해 하루하루 외형을 바꿔가고 있는 동탄 제2신도시의 단면이다.

‘신도시’라는 공간은 대한민국에서 참 낯익은 장소이다. 계속해서 생겨나는 신도시를 향해 사람들은 삶의 장소를 옮겨간다. 그리고 이 과정은 반복된다. 사실 원래의 땅 자체는 늘 그대로인데, 그 위의 풍경이 변하고, 그 변화에 따라 사람들이 움직인다. 과거를 지나 ‘역사’가 생기고, ‘현재’를 거쳐 ‘내일’을 향한다. 그 흐름을 따라 사람들의 삶의 모습도, 생활환경도, 모든 것이 변한다. 이 거대한 흐름은 늘 ‘현재진행형’이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그 안에서도 개인 각자의 경험이 존재하고 또한 그것은 각기 다른 경험으로 기억된다는 점이다.

<내일의 도덕> 시리즈에는 <역사적 현재>와 같은 의도된 연출은 배제되어 있다. 오히려 사진 속 동탄 신도시의 단면들을 직시하는 작가의 앵글만이 두드러진다. 때론 멀리서 혹은 가까이서, 때론 묵묵하고 덤덤하게 혹은 살짝 날이 서 있는 듯 예리하게 대상을 향한 포커스가 오랜 시간 동안 그곳을 주의 깊게 살폈을 작가의 시선을 대변한다. 거대서사로서 완성을 향해 가고 있는 그 빈 도시에서 오직 이 존재들만이 작가에게는 “살아 있는 주제”인 것이다. 흡사 화려한 완성을 향해가는 신도시 거대함 속에서 절대 돋보이지 않는 소소하지만 중요한 개인의 목소리인 양, 도시라는 거대 서사 속에서 존재성을 잃어가는 그 작은 목소리들을 발견하고 그 이미지를 채집한 것 같아 보인다. 메타폴리스 건물처럼 보이던 표시기둥, 곧 무언가 쓸모를 위해서 제멋대로 뭉개져 놓여 있는 시멘트 더미, 아직 사람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위압적인 아파트 숲…. 이것이야말로 ‘내일’을 위한 ‘현재’의 모습들인 것이다.

<내일의 도덕>은 한국의 사진가들이 즐겨 촬영하는 재개발 현장에 대한 날선 기록들과 닮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작업을 재개발에 대한 비평적 단상으로만 해석하기에는, 시간성에 대한 작가의 한결같은 탐구의 흔적이 너무나 짙다. 문화재 같은 오래된 것의 ‘현재’에 예전의 ‘과거’ 이미지를 중첩시키는 <역사적 현재>의 기법이 한 동안 유행하던 연출 사진이나 작가의 시그니처 같은 스타일로만 단순히 굳어져버리지 않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즉 사진이라는 현대미술의 보편적인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안성석 만이 내고 있는 ‘다른 목소리’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역사적 시간 속에서 함께 흐르고 있는 개개인의 시간성, 즉 거대한 굴레 안에서 보이지 않지만 그래서 더 돋보이는 작은 기억들에 대한 시각적 은유라고 말할 수 있다.


Article 2012.12월호 리뷰
한국현대미술 시간의 풍경들
Landscapes of Moment 확장된 오늘의 사진을 보다  
성남아트센터 큐브미술관   10. 9-11. 25
  

더 이상 사진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장정민 미술평론가


사진은 언제부터 예술로서 인정받은 것일까? 대체 예술사진이라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더 근본적으로 사진이란 무엇일까? 과거에 비해 사진전이 급격히 늘어나고 전문가들이나 쓸 법한 카메라가 대중에게 널리 보급되기까지, 오늘날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적절한 답을 찾기 어렵다는 점은 놀라울 정도이다. 이런 측면에서 <한국현대미술 시간의 풍경들>전은 그동안 주목받았던 한국 현대사진들을 한 자리에서 살펴볼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앞서 언급했던 질문들을 자연스럽게 제기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번 전시의 부제인 <확장된 오늘의 사진을 보다>1는 필자가 논의하고자 하는 내용의 적절한 출발점을 제공한다. 이 말은 ‘사진다운’ 사진과 ‘사진답지 않은’ 사진이 존재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2 따라서 이번 전시에 참여한 21명의 작가들을 통해 오늘날 예술사진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현대미술에서 사진의 역할은 어떻게 변모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이를 위해서 반드시 수반되어야 할 질문은 바로 사진다움, 다시 말해 사진의 본질이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탐구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우리는 자연스럽게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의 『밝은 방(La Chambre Claire)』을 떠올리게 된다.3 실제로 그는 여기에서 사진 자체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떤 본질적인 특징을 지니는지를 밝히면서, 사진이 촬영의 대상이 되는 지시체(referent)와 감광물질을 반드시 필요로 함을 증명하였다.4 무엇보다 그는 사진에서 지시대상의 존재를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사진 속 대상이 과거의 특정한 시점에 촬영자와 카메라 앞에 ‘분명히’ 존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회화를 비롯한 다른 시각예술의 매체와는 달리 사진은 지시대상이 없이는 절대로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다.5 이렇게 볼 때 이번 전시에서 발견되는 사진다운 사진들은 어떤 것들일까. 오형근과 변순철은 각각 소녀와 전국노래자랑에 참여한 참가자들의 초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이와 유사하게 윤정미는 아이들의 초상과 그들의 소유물들을 보여준다. 풍경의 경우 최원준은 일상적 도시 환경 속에서 발견되는 전후(戰後)의 징표들을 담아내며, 변순철은 아름다운 자연환경 속에 침투한 인공물을 통해 개발의 흔적을 담아내고 있다. 즉 이들의 작업은 모두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는 점, 다시 말해 사진 속 대상들이 특정한 순간에 작가와 카메라 앞에 존재했음을 증언한다는 점에서 사진다운 사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의 사진은 공통적으로 특별히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는 특징을 지닌다. 그리고 이는 예술사진이 반드시 아름다울 필요는 없음을 드러냄과 동시에 대중이 예술사진에 기대하는 것 사이의 간극을 보여준다.6 즉, 이들의 관심은 대상을 특별히 아름답게 보여주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사회를 점유하고 있는 시대적 징표 혹은 징후들을 사진을 통해 탐구하는 것에 있는 것이다. 구도나 프린트 크기의 선택과 같은 이들의 형식적 전략 또한 바로 이러한 목적을 위해 봉사한다. 일상에서 놓치는 사소한 것들은 이러한 전략을 통해 ‘지금, 여기’를 대변하는 것들로 사진을 통해 제시되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사진들은 지시대상을 일종의 의미 있는 ‘오브제’로 취급한다고 볼 수 있다. 어떠한 대상을 그저 아름답게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이들은 굳이 사진을 선택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아주 평범한 대상일지라도 그것들은 작가에 의해 선택되고 촬영됨으로써 특정한 의미를 지니게 되며 미술관의 한 공간을 차지하는 예술작품으로서의 지위를 부여받는다. 그러나 이 전시에서 목격되듯 사진예술은 단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는 것에 안주하지 않는다. 이를 편의상 크게 두 부류로 다시 나눈다면 전자는 촬영 대상에 인위적인 변형을 가하거나 치밀하게 연출된 장면을 재현하는 경우이고, 후자는 타 매체와의 결합이나 사진 자체에 대한 인위적 조작을 적극적으로 가하는 경우라 할 수 있다. 전자의 경우는 지시 대상을 기계적으로 재현한다는 점에서 앞서 언급한 사진다운 사진과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촬영자가 지시 대상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입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러한 작업들은 대상 자체에 대한 재현을 통해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기보다는, 작가의 예술적 실천(practice)을 사진적으로 재현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다시 말해 이 경우 사진은 일종의 조형적 행위와 그것에 담긴 의미를 재현하는 수단으로 도입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들은 그 자체로도 이미 예술적 산출물이라 할 수 있으나, 그것들은 사진이라는 기계적 재현을 통해 비로소 관객들에게 전달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작품의 지시 대상들이 대개의 경우 일시적이고 다량으로 복제되어 체험될 수 없다는 점으로 인해 사진은 필연적으로 이들을 재현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최근의 사진은 타 매체와의 결합이나 사진 자체에 대한 조작 현상이 두드러진다. 가령 강홍구의 작업은 출력된 사진에 직접 채색을 함으로써 회화와 결합되는 양상을 지니며, 권오상은 미리 만들어 둔 조형물에 사진을 부착함으로써 조각과 결합되는 성향을 보여준다. 그러나 디지털 기술을 통해 조작된 사진 이미지들이 결과물로 제시되는 케이스가 점차 증가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물론 이러한 방식을 통해 작가들이 제시하고자 하는 의미는 무척 다양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성이나 디지털 기술을 통한 적극적 조작은 실재 같은 가상을 창조하며, 이를 통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한다고 여겨져 왔던 사진의 신화를 해체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러한 결과물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실재하는 대상을 촬영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현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가상의 존재인 것이다.7 요컨대 이러한 기술의 발달과 맞물려 사진은 원본과 복제의 차이, 더 나아가 실재와 가상의 차이가 무너져 내린 오늘날의 현실을 반영하는 예술작품을 생산하는 효과적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처럼 현대미술 내에서 사진은 표면적으로 다양한 스펙트럼의 확장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현상이 단지 사진의 형식적 다양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전통적인 예술사진이 대상에 대한 기계적 재현을 통해 가능한 것이었다면, 이제 사진은 다양한 예술적 실천의 기록 수단이자 그러한 실천의 재료로 기능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욱 합당한 것이다. 사진 이외의 다른 매체를 다루던 작가들이 사진을 작업에 도입하고 그 결과물을 사진으로 산출하는 현상이 늘어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현상 속에서 이제 사진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현대미술 작가만이 존재할 뿐. 

각주 
1. 이는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의 유명한 글인 「확장된 장에서의 조각(Sculpture in the Expanded Field)」을 떠올리게 한다. 
2. 물론 이러한 구분은 지나치게 이분법적인 분류라고 볼 수 있으나, 논의의 전개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임의적인 전략적 선택이었음을 밝힌다. 
3. 그러나 그의 글에 대해 많은 경우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punctum)의 개념에 주목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사진의 본질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가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논의의 핵심도 아니다. 
4. 그가 크게 다루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촬영자에 대한 것이다. 사진은 지시대상, 감광물질, 그리고 촬영자의 조합으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5. 그림은 대상이 없어도 작가에 의해 재현될 수 있다. 조각을 비롯한 다른 시각예술의 매체 또한 대부분 마찬가지이다. 
6. 이번 전시에 참여한 김윤호의 작업에서 잘 나타나듯, 인터넷 동호회 등을 통해 나타나는 많은 사진 이미지들은 대개 과장되거나 미화된 것들로써 대중들의 관심이 실재의 대상을 재현하는 것 자체에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7. 김준의 작업에서 도자기로 나타나는 것들은 사실 컴퓨터 소프트웨어로 만들어진 가상의 대상에 불과하며, 이혁준의 작업 또한 그가 촬영한 많은 식물의 이미지들이 합성되어 만들어진 가상의 숲에 불과하다.

현재를 ‘현재’로 만들기

김노암(전시기획자)

1
현재와 과거가 조우하면 뭔가 의미심장한 사건이 벌어질 것 같다. 그 만남이 어떤 특별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면 더더욱 의미심장할 것이다. 작가가 하나의 대상에 의미와 형식을 부여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매우 성공적으로 부여하는 것은 미덕이다. 대상은 비로소 스스로 서있는 독립된 무엇인가로 변화한다.

그런데 한국의 현대사를 관통하는 흑백의 사진이미지와 현재를 은유하는 칼라 이미지의 병치와 나열은 그 자체로 독립적일 수 없다. 한 장소, 한 건물, 한 기념물이 의미심장하기 위해서는 ‘현재’만으로는 불가능하다. ‘현재’의 밖의 것들이 전제되어야 한다. 과거형의 문맥, 이야기들, 사건들이 이미 있었어야 한다. 그것이 단지 망각되어 있을 지라도.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것은 이미 망각의 세계이고, 대상 없음의 세계이다. 망각은 삶을 시간을 헛되이 보냈다는 의미로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꼭 그렇지는 않다. 망각을 통해서, 혹은 망각과 유사한 효과를 통해서 비로소 온전히 눈앞의 대상과 사건에 몰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작가들이 다루는 몰입의 문제이기도 하다. 기억과 망각, 의미와 의미 없음의 변증법말이다. 다른 시간과 공간을 점유하는 이미지들 간의 신비한 변증법적 운동이야말로 현재를 구성하는 요체다.

한편 이미지의 세계에서 과거란 실제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구성하는 것이다. 현재가 온전히 현재가 되기 위해서 과거와 미래는 구성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역사적 현재’라는 조어는 불가능한 순간을 표현한다.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결코 벌어지지 않았던 사건이 가능해진다. 현재의 자리에서 바라본 과거는 결코 실제 그 당시의 현재와 동일하지 않다. 다만 유사할 뿐이다. 이미 오래전 지나버린 현재와 유사한 것, 그것이 ‘역사적 현재’로 표현된다. 이미지를 다루는 이들에게는 도전이다.

그러기에 ‘역사적 현재’란 ‘모든 역사는 현대사(B.크로체)’로 번역할 수 있다. 과거의 의미, 과거의 이미지는 현재의 투사이며 현재를 구성하는 기제가 된다. 안성석의 작업은 외적 시간의 단절을 내적 시간의 문제로 돌려놓는 작업이다.

2
어떤 대상을 주목한다는 것은 주변의 사물로부터 분리하여 관찰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우 섬세하고 신중한 태도가 요구된다. 선택된 대상이 아닌 나머지 사물들을 의식에서 모두 배제하여 무의식의 단계로 넘겨버린다. 이 과정은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서 저절로 이루어진다. 그렇다고 그 사물들과 아무 관계를 갖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관계가 의식에 걸러지지 않고 무의식적 차원에서 벌어진다는 의미일 뿐이다. 

현재든 과거든, 현재와 과거의 관계이든 그것이 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의미 없음의 운동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어떤 대상에 주목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대상이 존재해야 한다.

“나는 문화들 간의 대화는 하나의 커다란 오해라고 생각한다.(엘렌 베지)” 그런데 단지 문화들 간의 대화만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같은 사물이라도 다른 시간을 사는 대상일 경우, 현재와 과거의 대화 또한 하나의 커다란 오해인 것이다. 문화란 삶과 연동하며 한 시절의 삶과 다른 시절의 삶은 유사함 그 이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안성석의 작업은 현재와 과거를 상호 호출하여 어떤 의미를 만드는 과정이자 동시에 ‘만남’과 ‘관계’가 본래 오해라는 것을 함축한다.

“언어에는 유사성에서 동일성을 연역해 낼 수 있는 방법이 없다.(버트란드 러셀)” 유사성과 동일성이 만나는 사건은 어떤 신비한 비의가 필요하다. 같은 사물이되 같은 대상은 아닌 것이다. 그 대상들 간의 거리는 은하계의 별 만큼 멀며 동시에 그 간격을 메우는 것은 정신의 몫이다. 거기에 이미지의 마술이 작동한다. 작가에게 대상은 이미지와 형상으로 존재한다. “작가는 형상으로 사유한다(들뢰즈)”. 이미지와 형상은 단지 역사와 과거를 또 그에 대한 기억을 복원하려는 것에서 멈추지는 않는다.

오늘날 집단 창작과 집단 기억으로서 예술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 과거 예술은 미적 이념이 아닌 그 시대의 지배계급의 정치적 메시지나 이데올로기로 봉사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다. 그것은 이미 정치-예술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비록 본격적인 정치-예술이 아니라하더라도 예술이 기억과 혹은 역사와 만날 때, 예술은 불가항력적으로 그 시대의 가장 지배적이며 가장 강력한 이념과 이미지-정치와 만나게 된다. 안성석의 작업에는 과거의 것에 대한 역사적 시선을 정치적 시선으로 바꾸는 이미지의 트릭이 있다. 거기에 미적 시선이 교묘하게 연동한다. 역사와 정치와 미학 사이에 작동하는 운동이 이미지들 사이에서,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의식에서 벌어진다. 사물과 사물의 이미지에 은폐되어 있는 힘이 작동한다.

현대예술의 세계에서는 하나의 기념물이 결코 하나의 기억이나 의미로 서술되지 않는다. 기념은 특별히 공적인 세계를 구성한다. 사적 영역을 상징하는 예술일수록 공공의 기억은 애초부터 비범한 결합이고 조우이다. 시각이미지가 예술과 정치와 역사의 간극을 교묘하게 균형 잡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 과정에 현재는 온전히 ‘현재’가 되고, 안성석의 작업은 그에 도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제스처를 매개로 몽타주 된 ‘사건’

김화자(미학, 명지대 겸임 조교수) 2009

안성석은 이전까지의 작업에서 우연히 한 장소에서 느껴지는 ‘데자뷰’ 현상처럼 돌발적으로 생기는 자신의 특유한 체험을 한 장의 사진에 두 개의 공간을 합성 혹은 병치시키면서 잠재적으로 공존하는 것들을 가시화 시키는 작업을 일관성 있게 해왔다.  2009년도 SeMA 프로그램에 선정되어 기획된 는 작가가『조선고적도보』, 혹은 개인이나 미군들이 소장했던 자료들에서 직접 찾아 낸 역사적인 유적지들의 흑백 사진을 현존하는 문화재에 병치되도록 스크린을 설치하고 과거의 사진 이미지를 투사한 후 작가 자신이 참여하며 촬영한 퍼포먼스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안성석의 작품 3가지, 즉 같은 장소지만 시간대를 달리하는 문화재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과거의 역사적인 흔적을 증명하는 사진을 찾아서 현재의 풍경에 연접시키는 제스처, 빔 프로젝터로 투영한 스크린의 영상을 실재 공간의 유적들과 일치하도록 맞춘 몽타주 작업, 과거와 현재를 지속하는 시간의 흐름 혹은 공존이란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다. 
 첫 번째로, 역사적인 현장의 서로 다른 두 시간 대를 병치시키면서 공적인 기억과 사적인 기억을 연결시키는 이와 같은 작가의 몸짓은 사진을 찍기 위해 프래이밍과 포커싱에 필요한 일반적인 촬영 행위에서 확장된 개념적인 행위인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빨리 변화해 가는 도시 풍경 속에 삽입된 과거의 역사적인 현장을 바라보고 있는 작가의 현전은 지나간 과거와 현재, 미래의 매개자 혹은 지속하는 역사의 증언자이다. 
 두 번째로, 아카이브적인 증명사진 혹은 개인의 기념사진이 스크린에 투영된 순간현재의 모습과 절묘하게 맞춰진 몽타주의 효과에 대해서 살펴봐야한다. 영화 편집방식의 하나인 몽타주는 이미지들의 연속이 총계가 아닌 ‘새로운 실재성’을 창조하며 그 속에서 삶들의 공존재, 동시성을 느끼게 해준다. 특히 다다이스트들에 의해 예술의 순수한 원작성과 사회를 비판하기 위해 활용된 포토몽타주가 이질적인 장면들을 중첩, 병치시키면서 혼란스럽고 해체된 세계의 모습을 충격적으로 고발하는데 효과적이었다면, 에서 스크린의 검은 틀로 단절된 컬러와 흑백 사진의 대조는 연속되는 장소에서 분리된 시간의 차이가 시선의 통일성을 깨고 새로운 완결성으로 종합되려는 움직임을 파괴하면서 완결되지 않는 미규정적인 의미를 생산하는데 효과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현존하는 풍경 속에 문화재가 지닌 존재론적으로 결정된 의미보다는 시간의 흐름과 상황 속에서 재 조직화하는 역사적인 정체성에 대한 탐색이라고 볼 수 있다. 
 세 번째로, 컬러와 흑백, 과거와 현재의 대비로 병치된 사진들에서 변화된 세월의 무상함에도 불구하고 “그 때 거기에 존재했었음”이란 부정할 수 없는 절대적인 과거는 작가와 함께 살아 숨쉬는 “지금 여기”에 공존함을 보여준다. 베르그손은 시간이란 지속적인 흐름으로 단절된 현재는 볼 수 없고 과거와 미래로 잠식하며 계속 변하는 지속적인 흐름으로서 현재에는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고 과거와 미래로 분산되는 현실적인 시간은 잠재적인 시간과 공존한다고 보았다. 현재란 오로지 개개인의 주체에 의해 질적으로 독특하게 경험되는 것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비록 정지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우리의 기억을 통해 과거와 현재는 상호침투하기 때문에 시간은 과거 현재가 서로 영향을 주면서 매시간이 새롭게 창조되며 미래로 지속한다고 볼 수 있다. 
 스크린위에 흑백사진을 투영시키는 빔 프로젝터의 빛은 , 폴 비릴리오(P.Virilio)가 미세한 뇌신경 발작 같은 “피크노렙시(picnolepsie,기억 부재증)” 현상을 일으키며 관람자의 의식을 균열시켜 환영을 볼 수 있다고 지적했듯이, 과거의 역사와 현실의 상황이 상호 작용하면서 사회적이고 집단적인 기억을 떠올리게도 하지만 과거와 현재는 잠재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의 불분명하고 모호한 공존 속에서 잠재적인 기억들을 솟아오르게 해준다. 무의식 속에 침잠해 있던 개인의 고유한 기억들을 상기시키는 가운데, 현실적인 상황과 잠재적인 것이 충돌하는 순간 불분명한 경계 속에서, 들뢰즈가 말했듯이, “비물질적인 사건”들을 체험하게 해준다. 즉 사진기에 의한 기계적인 전이가 만들어 내는 시간의 변화는 지속적인 흐름에 균열을 내어 응축되고 긴장된 것이 드러날 수 있다. 같은 장소이지만 스크린의 틀에 의한 시간적인 균열은 선형적인 시간의 흐름을 깨고 잠재적인 무엇인가가 솟아나게 해준다. 과거에서 현재로 진행하는 시간의 지속은 작가 혹은 관람자의 기억을 통해 다시 현재에서 과거로 올라가는 순수 기억을 통해 과거와 현재는 선형적이지 않는 양방향으로 작용하면서 시간의 질적 비약 속에서 다양한 체험들이 가능해진다. 정지된 역사의 한 순간이 촬영으로 인해 탈 서사화되어 재구성된 장면들, 즉 불에 타원형을 상실했던 팔달문 혹은 해태상과 북한산 사이에 버티고 선 광화문, 화재로 소실되어 새로이 복원 중인 숭례문, 수학여행 온 학생들에 둘러싸인 첨성대, 질주하는 자동차의 불빛 궤적 뒤로 보이는 경성역 등은 한일 합방, 독립운동, 6.25 전쟁 등으로 파란만장했던 대한민국의 근대사로부터 사진 이미지 없이는 상상할 수도 없는 현대의 하이테크놀로지의 시대로의 확연한 변화도 읽어낼 수 있다. 작가가 과거의 정지된 한 순간을 끼워 넣은 몽타주 작업은 현재 진행 중인 삶의 변화 속에 부재하는 과거가 현대의 첨단 과학 문명 속에서도 계속 지속하며 새로운 것들이 생겨날 수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동이 트거나 해가 저무는 현실의 배경 속에 재구성된 과거는 이미 과거 자체가 아니라 어떤 창조적인 흐름처럼 새로운 역사를 일구면서 모노크롬으로 치환된 역사적인 증거물들은 전환된 문맥으로 편입되어 관람자로 하여금 새로운 체험을 할 수 있도록 해준다. 
 작가가 작업 후에 같은 장소에서 다시 촬영한 것으로 전시장 입구에 설치되었던 텔레비전 동영상에서 볼 수 있는 문화재 주변의 일상은 자신이 작업했던 시간도 이미 지나 간 과거 속으로 사라져서 부재하지만 여전히 현재, 미래의 작업으로 지속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한 것이다. 결국 현재와 과거, 기억과 망각, 현존과 부재를 연결시켜 주는 스크린을 설치하고 과거 속으로 자신을 투영시키면서 던진 질문들은 한국인으로서 동시대의 문화적인 정체성은 물론 작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묻는 행위였다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사진과 동영상, 작가의 몸을 연결시키는 제스처는 사회적인 기억을 통해 관람자 개개인의 무의식에 존재하는 잠재적인 것을 순간적으로 독특하고 우연적인 사건처럼 질적으로 다양하게 체험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또한 행위와 스틸 사진, 동영상이란 적극적인 매체 혼합을 모색하며 생생한 현장성과 편집된 시간성을 통해 과거, 역사와 현재 그리고 미래와의 말 걸기를 밀도 있게 보여 주었다.